

삼 년 가뭄을 견뎌도
석 달 장마에는 못산다
AtoA
1.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부탁의 시작은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다음 날 지방 출장을 앞둔 사회초년생 성윤은 두 살짜리 어린 딸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장준을 찾았다. 윤이 하루만 봐 줘. 낮 시간엔 시터 분 오셔서 괜찮은데, 그 뒤로 애를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부탁 좀 할게. 딱 하루만 애기 잘 때까지 같이 있어 줘.
평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어색하게 인사만 하고 지나가는 사이일 뿐인 성윤이 갑자기 부르기에 장준은 별생각 없이 추리닝 차림으로 나왔다. 그러다 팔자에도 없는 고급 스시집에서 한 끼를 거하게 먹고는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고 있을 때, 그제야 성윤이 이런 비싼 밥을 사 준 이유를 눈치채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별다른 소리 없이, 혹여나 제가 제안을 거절할까 싶어 초조한지 식사를 제대로 못 한 성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마침 그날 시간 비어요.
“아기 상어 케이크 사 준다고 했자나.”
“고래밥 사 왔자나. 이것도 대충 물고기야.”
“케이크 아니자나! 아기 상어도 아니자나!”
“걍 먹으면 안 될까? 이것도 성윤이 형한테 걸리면 나 디지는, 아니, 혼나는데.”
장준이 처음 성윤의 부탁으로 윤이를 봐줬을 때, 그때 윤이는 두 살이었다. 깨어있는 모습보다 자는 모습을 더 많이 봤고, 가끔 울기는 했어도 웃긴 얼굴로 까꿍을 해 주면 금방 빵긋거리면서 웃던 애기였는데. 지금 윤이는 다섯 살이다. 이제는 잠도 많이 안 자고, 말이 트여서 어느 정도 장준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애기 옆에 종일 붙어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덜 심심해서 좋긴 한데, 단점이라면 여느 미운 다섯 살이 다 그렇듯 윤이는 자기가 원하는 게 있으면 온종일 그 얘기만 한다.
“야, 이장준. 윤이 과자 사 주지 말랬잖아.”
“형은 퇴근하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예요? 이제 내가 윤이 돌보는 건 고맙지도 않다 이거지?”
“윤이도 장준 삼촌한테 자꾸 뭐 사 달라고 조르지 마. 장준 삼촌 돈 없어.”
“삼촌 돈 업서어? 거지야?”
“아니, 왜 애 앞에서 나를 거지로 만들고 그래…”
매일 있는 일이었다. 장준이 윤이와 함께 성윤의 집 거실 소파에 누워 투닥거리고 있으면 찌든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 성윤이 문을 열고는 쯧쯧거린다. 성윤은 신발을 벗으면서 장준을 향해 잔소리를 하고, 윤은 그래도 아빠가 와서 좋다며 까르륵거리고, 장준은 본분을 다했으니 슬슬 갈 채비를 한다.
“야, 장준아.”
“엉?”
“저녁 먹고 가. 오늘 윤이가 치킨 먹고 싶다고 해서 오는 길에 시켰어.”
주섬주섬 일어나 짐을 챙기고 저 갈게요, 말하면 이렇게 성윤이 저를 붙잡는 날도 더러 있다.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챙기던 짐을 내려놓고 다시 두 시간 내내 앉아 있던 소파에 드러누우면 된다.
아빠가 오자마자 쪼르륵 달려가서는 아빠 품에 코알라처럼 안겨 매달려 있던 윤이가 장준을 향해 거지라며 손가락질을 하고 깔깔 웃는다. 어른한테 그런 말 하면 못써, 윤아. 옷도 못 갈아입은 채 품에 안은 딸내미를 혼내면서도 말투에 웃음기가 섞인 걸 보면, 성윤은 다섯 살짜리 딸내미가 저를 보고 ‘거지’라고 부른 게 제법 웃긴 모양이다. 참나. 애 봐 준 보람이 없네. 애 아빠한테도 무시당하고, 애한테도 무시당하고.
2. 여름 소나기는 소 잔등을 가른다
원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다. 당시 성윤의 또래 친구들은 다 결혼을 이미 했거나 결혼 계획이 있는 상태였다. 5년을 만난 여자 친구도 슬슬 결혼이니, 자녀 계획이니 이야기를 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저 역시도 조만간 결혼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을 했다.
결혼 하루 전까지도 성윤은 제 결혼을 의심했지만, 원래 결혼 직전에는 다 그렇다는 인생 선배들의 말만 믿고 그렇게 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했다. 애정 없이 한 결혼은 아니었다. 성윤은 여자 친구를 사랑했고, 여자 친구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가기엔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그런 불안정한 마음 상태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니, 그 생활이 평탄하게 굴러갈 리가 없었다.
1년을 같이 살아 본 결과, 성윤도 성윤의 와이프도 이런 껍데기뿐인 결혼은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려운 결정이긴 했으나 서로를 위해 성급했던 선택은 무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혼 절차를 밟던 결혼 생활 막바지의 두세 달 정도가 성윤의 결혼 인생에 있어 가장 마음이 편안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순탄한 이혼이 될 줄 알았건만, 발목을 붙잡은 건 이혼 절차를 밟은 직후 들려온 와이프의 임신 소식이었다.
아이가 생겼다고 다시 합칠 생각은 없었다. 성윤도, 이제는 전 와이프가 된 성윤의 와이프도. 아이는 결국 성윤이 양육하기로 했다. 엄마 없이 아이를 키우려니 앞길이 막막했지만, 불행했던 결혼 생활과는 달리 아이가 태어난 순간에 성윤은 진심으로 기뻐했고 아이를 맡게 된 것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은 실패했지만 좋은 아빠는 되어 보고 싶었다. 누군가는 이런 결심을 한 성윤을 호구라고 할지도, 또 누군가는 이혼이라는 흠을 달고도 자기 욕심으로 아빠는 되겠단 결심을 한 성윤을 욕할지라도, 성윤은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다. 윤이를 제가 키우기로 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성윤에게는 윤이가 인생의 전부였다. 성윤은 매분 매초를 윤이를 생각하며 살아갔다.
그래도 현실적인 문제는 있었다. 성윤의 부모님 두 분을 비롯한 일가친척은 모두 외국에 있다. 그래서 성윤이 회사에 있는 시간에는 따로 고용한 베이비시터가 윤이를 돌보곤 했다. 하지만 시터가 퇴근해야만 하는 시간까지 성윤이 집에 오지 못하는 날이면 곤란해졌다. 오버타임 비용을 지급하며 시터를 붙들어 두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 때문에 집에 제때 돌아올 수 없어 난처한 날들이 종종 있었다.
2년 전에 장준을 찾아간 것도 궁지에 몰려 한 결심이었다. 아는 사람들한테 싹 다 전화를 돌렸지만 윤이를 하루 정도 봐 줄 수 있다는 사람이 없어 좌절했을 때, 문득 떠오른 게 며칠 전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에 마주쳤던 이장준이었다.
성윤은 아파트 21층에, 장준은 같은 라인 아파트의 6층에 살고 있다. 출근길에 장준과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날, 성윤은 거울을 힐끔거리며 장준을 내내 훔쳐봤다. 어디서 봤더라.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낯이 익은 얼굴이라는 건 알면서도 이름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장준이 제게 아는 척을 해 왔다. 성윤이 형 아니에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생각났다. 이장준. 저보다 세 학번 아래였던 대학 시절 같은 과 후배였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오며 가며 얼굴은 몇 번 봤던 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장준이 입학했을 당시 성윤은 한참 졸업 준비로 바쁠 시기여서 시시한 모임에는 잘 참석하지도 않았고, 저학년들이 듣는 수업을 듣지도 않아 장준과 같은 과라고는 해도 마주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얼굴과 이름만 겨우 아는 사이였다.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졸업 후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잠깐 사귀던 여자 친구가 저와 헤어지고는 제 후배와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 후배가 장준이었다. 그래도 나쁜 감정은 없었다. 헤어지자는 말도 성윤이 먼저 여자 친구에게 꺼냈었다. 안 그래도 취준 때문에 바빠 죽겠고 하루하루 불안함만 있었는데, 진작 취업에 성공한 여자 친구는 그런 제가 비싼 척을 한다며 바가지를 박박 긁었으니. 그 당시 성윤에게 연애는 좀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니 헤어진 전 여자 친구에게 새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해도, 그게 거슬리거나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대체 어떤 사람과 사귀는지는 궁금해서 생각날 때마다 전 여자 친구의 SNS를 구경하기는 했다. 이야, 데이트 자주 하네. 나랑 사귈 때 가고 싶다고 하던 인스타 핫플 다 돌아다니고. 이 친구도 슬슬 고학년이 됐을 텐데, 참 낙천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냥 연애를 열심히 하는 타입이었을까? 난 저 시절에 너무 힘들어서 잠깐 고자 됐었는데.
아무튼 그게 장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내 전 여자 친구와 사귀던 놈. 그 녀석과 어쩌다 한 동네 주민이 됐고, 아이를 하루 봐 줄 사람이 없어 부탁을 하게 됐고, 그게 하루 부탁이 아니라 어느덧 2년 째의 정기적인 부탁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장준과 가까운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전 여자 친구 얘기는 윤이를 정기적으로 부탁하게 된 지 일 년이 조금 지났을 시점에 슬쩍 물어봤었다. 대학 시절 술자리란 술자리에는 모조리 참석했던 녀석으로 알고 있었는데, 윤이가 잘 때 둘이 소주 한 병을 까다가 이 녀석이 생각보다 일찍 꼴아버렸다. 한 네 잔 마신 거 같은데. 뭐야, 이 알쓰는?
덩치는 산만 한 주제에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녀석을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6층에 장준을 데리고 내려왔는데, 술을 먹어서 현관 비밀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끙끙거리고 있어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쉴 새 없이 삐삐거리는 도어락에 결국 하는 수 없이 녀석을 다시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루 재워 주기로 했다. 군소리 없이 윤이를 잘 봐 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의외로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21층으로 올라가던 중, 성윤은 슬쩍 말을 꺼냈다.
‘은선이 기억나냐? 걔 나랑 잠깐 만났었어. 나랑 헤어지고 너랑 사귄 거로 아는데. 알고 있었어?’
최근 매번 장준을 보게 될 때는 늘 옆에 윤이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성윤은 윤이의 아빠로서 언행을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장준에게도 따로 부탁했었다. 윤이 앞에서는 좋은 어른 행세 좀 해 달라고. 장준은 제 딸과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성윤의 부탁 때문인지 윤이 앞에서 제 나름의 말조심, 행동 조심을 해 왔다. 욕 안 하고, 아이의 정서를 해칠 수도 있는 말 삼가고, 흐트러진 모습 보여 주지 않으면서. 그래서 이렇게 술을 먹고 풀어져 있는 장준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윤이에게도, 성윤에게도 보여 주지 않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덩달아 성윤도 풀어진 것 같다. 윤이가 없는 공간, 행동 조심을 하지 않아도 되는 때. 제 딸을 늘 돌보는 장준 앞에서 전 여자 친구 언급을 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됐다. 그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술기운이 잔뜩 올라 정신이 없던 상태에도 장준은 성윤을 빤히 바라보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엘리베이터가 21층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집에 들어가는 대신 키스했다.
그리고 그날, 장준과 처음으로 잤다. 바로 옆방에 윤이가 곤히 자고 있어 둘 다 이를 꽉 물어 소리를 참고,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에 아이가 깰까 싶어 격한 체위는 삼가며 아주 조심스럽게 이루어진 섹스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음 날 장준은 술은 먹었어도 어제 일은 똑똑히 기억한다고 카톡을 보냈다. 회사에서 카톡을 확인한 성윤은 덤덤하게 답장했다. 그렇구나. 알겠어. 근데 장준아, 너 다음 주 수요일 시간 돼? 윤이 좀 봐 줘. 나 그날 대구 가야 해서 집에 밤에나 오거든. 장준은 곧장 답장했다. 알써! 아주 짧고 간결한 카톡이었다.
3. 오뉴월 장마에 돌도 큰다
어린 나이에 얻은 이혼남, 그리고 싱글대디라는 타이틀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윤이가 태어난 이후로 성윤의 라이프스타일은 온통 윤이를 위주로 돌아갔다. 성윤에게 책임져야 할 것은 윤이 뿐이었다. 윤이 때문에 회사에 다니고, 윤이 때문에 주말에 집에서 쉬는 대신 지친 몸을 이끌어 외출하고, 윤이 때문에 살아갔다. 그런 성윤에게 장준은 매우 자극적인 상대였다.
윤이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던 연애와 섹스 라이프가 아쉬웠던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장준과의 그날이 하룻밤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은 것은, 성윤이 목마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목이 마른 줄도 모른 채 몇 년을 땡볕 아래에서 살아왔는데, 예상치 못한 비가 쏟아 내리자 가진 줄도 몰랐던 갈증이 해소되었다. 성윤에게 장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동안 덥지 않다고, 버틸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사실 슬슬 한계점을 느끼고 있었음을 깨닫게 한 사람. 그리고 평온하지만 다소 지루했던 일상에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쾌감을 선사해 준 사람. 마른 땅에 오랜만에 내린 비처럼, 마침 제게 필요하던 것을 찾아다 준 사람.
성윤에게 장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적시에 내리는 단비 같은 사람. 근데 처음에는 단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집중호우였다. 아니, 거센 바람과 함께 날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폭우.
장준은 최소 한 주에 한 번은 오후 시간에 윤이를 돌봤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성윤의 집에 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 년 전 그날 밤 이후로 성윤은 장준이 오는 날마다 장준에게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권했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적도 있고, 윤이를 데리고 셋이 외식을 한 적도 있고, 걸어서 오 분 거리인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을 보고는 나란히 주방에서 식사 준비부터 함께 한 날도 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윤이는 어느새 졸리다며 칭얼거린다. 성윤이 윤이를 방에 데리고 가 재울 때, 장준은 집에 돌아가는 대신 거실 소파에 앉아 성윤을 기다린다. 윤이를 재운 성윤이 나오면 둘은 함께 장준의 집으로 내려가 섹스를 했고, 섹스가 끝나면 성윤은 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정형화된 패턴이었다.
4. 장마에 떠내려가면서도 가물 징조라 한다
‘우리 이럴 거면 차라리 연애를 하는 게 낫지 않아?’
언젠가 한 번 장준이 그렇게 말을 했었다. 아마도 섹스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 참에 웬일로 장준이 데려다주겠다며 침대 아래에 뱀이 허물 벗듯 벗어놓은 티셔츠를 주워 입으면서 했던 말이었던 것 같다. 뭘 데려다줘,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오바하지 말라며 핀잔을 줬지만 고집 센 장준은 결국 저를 따라왔었다. 말로는 형 데려다주고 자기는 편의점 가서 맥주 한 캔 사 올 거라 그렇다는데, 지갑도 휴대폰도 안 들고 저를 따라나선 걸 보면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이러는 거라 생각하기는 했다.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얼굴도 자주 보고, 섹스도 하는 사이인데. 연애랑 다를 게 뭐야?’
그 할 말이 간접적인 고백일 줄은 몰랐지만.
성윤은 장준의 말을 못 들은 척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말이 안 된다 생각했다. 연락 자주 하고, 얼굴 보고, 섹스를 주기적으로 하는 것만으로는 연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장준이 제게 호감이 있다고 했거나, 조금 더 깊은 사이가 되고 싶다는 말로 고백을 했으면 아주 잠깐 고민하긴 했을 것 같다. 근데 당시에는 ‘우리가 연인과 다를 게 뭐냐’ 라는 장준의 말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어차피 연인 사이에서 할 법한 것들 다 하고 있으니 확실하게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정해 보자는 말로 들렸으니까.
그리고 설령 장준이 제대로 된 성의 있는 고백을 했다고 한들 성윤은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성윤에게 필요한 건 가끔 저 대신 아이를 돌봐 줄 사람, 그리고 윤이가 생긴 이후로 억눌렀던 성욕을 푸는 상대지 연애 상대가 아니었다. 이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성윤은 장준도 저와 같은 마음이기를 바랐다. 관계가 너무 무거워지면 한순간에 많은 걸 잃을 수밖에 없다. 가령 장준과 연인 사이가 되었다가 헤어졌을 때, 장준에게 다시 비는 시간에 윤이를 돌봐달라 말을 꺼내기도 껄끄러워질 것이고, 장준만큼 신뢰와 안정감이 있는 섹스 파트너를 다시 찾는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는 싫었다. 어찌 보면 장준이 한 고백이 하염없이 가볍고 무성의해서 다행이기도 했다.
그래도 장준의 입에서 ‘연애’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성윤은 이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기회가 생겼다. 너무 당연하게 매번 장준에게 윤이를 맡겼지만, 사실 이 역시도 장준이 제게 최소한의 호감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시간이 남아도는 백수라고 해도 아무런 대가 없이 자기 시간을 할애해 주기적으로 남의 아이를 돌보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그런데도 장준은 단 한 번도, 지난 2년간 단 한 번도 성윤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다. 막연히 얘는 정말 한가한 애구나, 할 일이 정말 없나 보구나, 그렇게만 생각을 했었는데. 무려 2년 동안, 못 해도 한 달에 서너 번은 부탁을 했는데 바빠서 안 된다거나, 할 일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다고 한 적이 하루도 없는 걸 보면 그간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인정하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장준 딴에는 계속 열심히 티를 냈던 걸지도 모른다. 굳이 호감이 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어도, 저를 좋아하고 있음을 지난 시간 동안 줄곧 말이다. 이를 너무 늦게 깨달은 것에 성윤은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5. 가물 그루터기는 있어도 장마 그루터기는 없다
호감이 있음을 온몸으로 표출하면서도 굳이 성윤에게 직접적으로 제 감정을 말하지 않은 것, 그건 장준 딴에는 배려였다. 젊은 나이에 애 딸린 돌싱이 된 거로도 이미 머리가 터질 것 같을 텐데, 그런 성윤에게 제 사적인 감정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성윤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라면, 제 감정을 표현한다고 해 봤자 돌아오는 것이 없을 것이란 무력감이었다. 성윤이 저를 안 받아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설령 성윤이 저와 같은 마음일지라도 말이다.
장준이 지켜본 지난 2년간의 성윤은 단 한 번도 연애를 한 적이 없었다. 교제 상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 어떤 누구와도 연애를 전제로 한 사적인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말하기도 했다. 자기 팔자에 연애는 무슨 연애냐고, 나중에 윤이가 대학을 가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연애에 꽉 막힌 사람이었다. 이혼남 딱지가 달려 있긴 해도 아직 멀쩡한 젊은 나이인데 굳이 저 정도로 연애 감정을 억눌러야 하나? 밖에 나가서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애 딸린 돌싱이라고 안 볼 텐데. 실제로 성윤에게 대시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좋은 직장 다니는 능력남인 데다가 얼굴도 제법 괜찮게 생겼으니까. 근데 그 모든 유혹을 쳐내고 성윤은 가정에만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야만 하는 강박감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성윤을 유혹한 건 아니었다. 그냥 호기심이었다. 성윤처럼 맹목적으로 가정만을 보고 사는 사람도 나약해진 상태에서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지 않을까? 그런 호기심.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꽉 막힌 인간도 약간의 술과 과거사, 그리고 묘한 분위기까지 함께 하니 쉽게도 유혹에 넘어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키스를 하고, 아이가 잠들어 있는 집에서 섹스를 할 때까지 조금의 강압도 없었다. 모든 것은 장준과 성윤 두 사람이 원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성윤과 주기적으로 그런 불장난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장준은 성윤에게 강요한 적이 없었다.
‘형, 애 아빠가 이래도 돼요?’
‘콘돔 끼우면서 그딴 말 하지 마. 진짜 발로 차 버리는 수가 있다.’
성윤은 약간의 죄책감은 있으면서도 저와의 이러한 관계가 싫지 않은 듯 보였다. 하긴, 아이에게는 자신을 잘 돌봐주는 삼촌과 제 아빠가 이런 관계인 게 충격적일 수는 있어도 엄연히 따지면 우리 관계는 불법도 아니고 우리가 하는 게 부도덕한 행위도 아니니까. 그동안 좋은 아빠 콤플렉스에 갇혀 성욕조차 억눌러 왔던 성윤에게는 저와의 한없이 가벼운 만남이 나쁜 조건이 아니었을 테다. 입 무거워서 소문도 안 내, 설령 소문을 내려고 한대도 공통 지인이 많지 않아 그럴 수도 없고, 일부러 시간 내서 멀리 찾아갈 필요도 없이 같은 아파트 동에 살아. 내가 생각해도 최성윤한테 이장준은 좋은 조건의 섹스 파트너였다.
관계의 시작은 분명 충동적이었고, 그 이후로 성윤과 주기적으로 만날 때도 장준은 이 순간을 즐기자는 마음이 더 컸다. 분명 그런 마음도 있었다. 아이가 있는 성윤은 장준과의 만남에 예민했다. 윤이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장준이 미묘한 시선을 던지면 인상을 쓰며 무언으로 장준을 말렸고, 꼭 섹스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장준과 밖에서 따로 만나는 걸 윤이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철저한 성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장준의 시선 속 성윤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본래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많다고 하니, 우리의 관계에 있어 지킬 딸이 있는 성윤이 늘상 저보다 약자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장준은 이 관계가 재밌었다. 학교 다닐 때는 눈도 똑바로 못 쳐다보던 무서운 선배 중 하나였던 성윤이 저와의 이 달콤한 불장난은 놓지 못하면서 제 아래에서 설설 기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분명 성윤과 이루게 된 모든 관계의 시작은 재미였다.
근데 어느 순간 도를 넘었다.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장준은 자진해서 성윤의 발아래로 몸을 낮췄다. 성윤이 다소 무리한 시간에 윤이를 봐달라 부탁을 해도 선약을 빼 성윤의 집에 들렀고, 윤이를 돌보는 것 외에도 성윤의 자잘한 부탁들을 들어주고 있었다. 장을 봐 달라든가, 윤이 때문에 집에 붙들려 나갈 수가 없으니 편의점에서 대신 뭐 좀 사 달라든가. 성윤의 그런 사소한 부탁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줬다. 장준은 본인의 감정을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최성윤 좋아하나 봐. 빠르게 순응했다. 결혼 한번 잘못해서 남은 인생 애 딸린 이혼남 소리를 몇십 년을 더 들어야 하는 최성윤을 좋아하게 된 제 처지가 우습기는 했지만, 그래도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코 재미로 성윤과 이런 관계일 수는 없으니.
정신을 차려 보니 장준은 성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장 최근 사적으로 다른 여자를 만난 게 언젠가 곱씹어 보니 벌써 반년도 더 지났다. 연애를 안 한 지도 일 년이 넘은 상태였다. 늘상 누군가를 만나고 있던 장준이 몇 달째 여자 친구 얘기를 안 하니 성윤도 그게 이상하다 싶었는지 슬쩍 물어봤었다.
‘너 요즘 왜 연애 안 하냐? 연애 안 하면 죽을 것 같이 굴던 놈이. 이장준도 드디어 나이 먹더니 끗발이 다 됐나? 그래, 나이 먹는 거 서럽지? 원래 그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비꼬는 투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그 당시 장준은 성윤의 날카로운 말에 그냥 웃고만 있었다. 어찌 됐건 성윤도 제 연애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니까. 비록 제가 성윤에게 원하는 것과 성윤이 제게 원하는 것이 달라도, 우리는 서로를 끝없이 신경 쓰고 있었다. 나는 최성윤을 좋아하니까 최성윤을 신경 쓰고, 최성윤은 이장준만큼 조건에 적합한 섹스 파트너를 또 만드는 것이 어려울 테니 이장준을 신경 쓰고. 그걸로 만족했었다. 어차피 최성윤이 나와 마음이 같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으니까. 서로를 신경 쓰이게 하는 존재가 되는 것만으로도 장준은 만족하려 했다.
6. 백 일 장마에도 하루만 더 비가 왔으면 한다
아이의 눈을 피해 몰래 섹스를 하는 것은 스릴 있고 야릇한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여건이 따라 주지 않으면 이런 불장난을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가령 매번 9시만 되면 졸린다고 칭얼거리는 윤이가 웬일로 자정이 넘어서도 잠이 안 온다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날이면 장준은 미련 없이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윤이만 재우고 금방 저의 집으로 내려오겠다던 성윤이 몇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연락을 해 봤다. 왜 이렇게 안 와? 윤이 벌써 자고도 남겠구만. 윤이 재우다가 형도 같이 존 거 아니지? 나 여태 기다렸다? 약간의 투정이 섞인 카톡을 보냈지만 그 뒤로도 또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만 성윤의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성윤은 윤이가 열대야 때문에 잠을 깊게 못 자고 있다 했다. 자장가를 불러 주고, 동화책을 읽어 줘도 얕은 잠에 들었다가 금방 깨서는 아빠 품을 찾는다는데, 그런 아이를 홀로 두고 장준을 만나러 가는 건 무리일 것 같다며 성윤이 자정이 넘은 시간에야 카톡을 보내왔다. 평소의 장준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그래. 애가 잠을 못 잔다는데 어쩔 수 없지. 윤이 잘 재우고, 형도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너무 늦게 자지 말고.
근데 그날의 요상한 심리가 발동했다. 늘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고 안주하려 했지만, 아이 때문에 올 수 없다는 성윤의 말에 빈정이 상했던 모양이다. 꼭 성윤과 섹스를 하고 싶어 그랬던 건 아니었다. 고작 주에 한 번, 주기가 조금 길어지면 두 주에 한 번 얼굴 보는 사이인데 그 기회를 한번 놓치게 되리라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이 있었다. 나라고 매번 한가해서 윤이 봐 주러 가는 거 아니잖아. 다 형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시간 빼는 거지. 형은 왜 그걸 모르지? 매번 내가 오 분 대기조 베이비시터 마냥 부르면 바로 뛰어오니까 이게 너무 당연해 보이나?
징조 없이 찾아온 짜증은 곧장 화를 불렀다. 장준은 성윤에게 다시 한번 카톡을 보냈다. 애 안 자면 내가 가서 재워 줄까? 윤이 나랑 있으면 바로 자는데. 아무리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쿵쿵거려도 최대한 카톡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 평소와 같은 말투로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답장은 10여 분이 지난 후에야 왔다. 그래도 아빠가 재워 줘야지. 고마운데, 사양할게. 장준은 답장을 읽자마자 침대에 눕혔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저도 모르는 사이 호흡이 가빠졌다. 성윤의 답장이 제게 기싸움을 거는 것이라 생각했다. 평소 섹스 때 제가 성윤을 놀린답시고 ‘애 아빠’라고 부르면 그렇게 언짢은 티를 내던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는 꼴에 아빠 노릇을 하려고 드는 게 같잖았다.
거칠어진 호흡을 겨우 가라앉힌 장준은 손으로 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었다. 그러다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앞에 서서는 좀 전에 헝클어트린 머리를 정리했다. 입고 있던 트렁크 팬티 위에 추리닝 바지를 덧입고는 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 성윤에게 다시 한번 카톡을 보냈다. 나 지금 갈게. 그러고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21층 버튼을 눌렀다. 6층에서 21층으로 올라가는 사이에도 몇 번이나 진정이 되지 않는 심장을 붙잡아야만 했다. 왜 이렇게 못난 짓만 골라서 하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성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딱 얼굴만 보고 가자. 얼굴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내가 오늘 야근하는 형 대신 윤이 봐 줬으니까. 섹스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얼굴만 보는 건데.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거잖아.
“안 와도 된다고 했잖아.”
당장 오늘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몇 시간 동안 딸 아이 옆에 붙어 있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성윤이 얼굴로 장준을 맞이했다. 하품을 한다고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왜 왔냐는 듯 짜증 섞인 시선을 던지는 성윤 때문에 장준은 좀전의 다짐을 져버렸다. 딱 얼굴만 보고 가겠다는 그 다짐을 말이다.
“나 형 좋아해.”
“야.”
“형, 나랑 만날래? 그냥 섹스만 하는 거 말고, 제대로 연애할 생각 없냐고. 어차피 형 애는 있어도,”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성윤이 손으로 제 입을 막는 바람에 장준은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성윤은 장준의 입을 막은 채 윤이가 있는 방 쪽을 한번 돌아보더니 곧 현관문을 열고 장준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신발도 채 신지 못한 성윤이 곧 따라 나왔다. 닫힌 현관문 앞에서 장준을 마주 보고 선 성윤은 그대로 장준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개새끼야, 야, 우리 윤이 아직 안 자는데, 윤이가, 어? 윤이가 들었으면, 어쩔 거야, 씨발…”
한 대만 때린 게 아니었다. 성윤은 씩씩거리며 장준의 얼굴에 연달아 몇 번이고 주먹을 날렸다. 장준의 기습적인 고백에 당황했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 나약한 얼굴을 하고 매섭게도 주먹을 날리는 성윤을 보면서 장준은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화가 나고 황당한 상황에서조차 방에 얌전히 누워있는 윤이가 신경이 쓰이는지 성윤은 목소리를 죽이고 또 죽였다.
성윤에게 얻어터지면서도 장준은 속이 시원했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원했던 건, 최성윤이 나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상황도 아니고, 최성윤이랑 섹스 파트너 같은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고, 최성윤이 내 말을 알아주는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얻어맞은 얼굴이 쓰라렸고 입안에는 피 맛이 진동했지만 후련히 제 마음을 성윤에게 고백했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그래서 장준은 충분히 힘으로 성윤의 주먹을 막을 수 있는 상황에도 얌전히 성윤에게 맞아 주고만 있었다.
실컷 분풀이를 마친 성윤은 말없이 바닥만 보고 있다가 눈가의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훔쳤다.
“하, 설마 몰랐어? 내가 형 좋아하는 거.”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멍이 든 얼굴로 저런 소리나 장준이 미웠는지 성윤은 마지막으로 장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몰랐겠냐? 내가 등신도 아니고.”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성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매정하게 닫혀 버린 현관문을 빤히 쳐다보다 장준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그래도 얼굴 봤으니까 됐네. 애써 덤덤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엘리베이터에 탄 순간 장준은 주저앉았다. 쪼그려 앉은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보니 엘리베이터는 금방 6층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와 담뱃갑을 쥐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여름인데도 차가운 새벽공기를 맞으며 담배 한 대를 물던 장준은 고개를 들어 손으로 아파트 창문을 셌다. 1층서부터 21층까지 창문을 하나하나 세다 여태 불이 켜져 있는 21층 창문을 발견하고는 헛웃음이 터졌다.
이제 저 집에 다시는 못 가겠지? 최성윤이 나를 안 부를 테니까. 왠지 서글펐다. 지난 2년 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성윤의 아이를 봐 준 게 처음으로 후회가 됐다.
7. 우립 만드는 동안에 날이 갠다
최성윤이 다시 나를 찾는다면, 그건 처음 부탁을 했던 그 날처럼 윤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일 거라 생각했다. 이미 성윤으로서는 사적으로 이 관계를 더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 터질 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장준을 상대해야만 할 것이고, 장준의 마음을 알게 된 이상 내내 그걸 모르는 척하는 것도 머리 아플 것이다.
연락이 온 건, 고백 같지도 않은 고백을 한 지 2주가 조금 지났을 시점이었다. 성윤은 처음 부탁을 했던 그 날과 똑같이 장준을 집 근처 식당으로 불러냈다. 이번에는 초밥 대신 소고기였다. 묵묵히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굽는 성윤을 앞에 두고도 장준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성윤이 저와 눈을 맞추는 것마저 부담스러운지 내내 시선을 불판 위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다. 그러다 성윤이 제 앞접시 위로 다 익은 고기를 몇 점 올려 주었을 때에야 눈이 마주쳤다. 장준은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윤이 때문에 온 거지?”
성윤은 그 말에 한숨부터 푹 내뱉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딸 아이 이름을 듣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는 성윤에 장준은 미안해졌다. 그날 윤이가 있는 집안에서 성윤을 곤란케 한 게 후회됐고, 그 때문에 성윤이 얻었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니 속이 턱 막혀왔다.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었다. 막 사는 것 같아도 제 앞가림은 희한하게 잘한단 소리만 들어왔는데, 그날 성윤의 앞에서 한 행동은 지금 제가 돌이켜봐도 어른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최대한 오늘의 만남도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언제 가 주면 되는데? 애만 봐 주고 형 퇴근하기 직전에 집으로 가면 되잖아.”
성윤이 연락하지 않는 2주 동안 혹시라도 이런 상황이 생길까 봐 미리 방편을 여럿 생각해 두었다. 그 방편 중 하나가 우리의 정형화된 패턴을 부수는 것이었다. 윤이를 돌보는 날에는 늘 섹스로 하루 마무리를 하곤 했었는데, 이제 섹스를 그날의 코스에서 빼려고 한다. 섹스뿐만 아니라 성윤과도 얼굴 보는 시간을 대폭 줄인다. 정말로 윤이를 돌보기만 하고, 성윤과는 담백한 관계로 남는다. 그러면 시간이 흘러 성윤도 저를 용서하지 않을까? 나에 대한 화가 누그러지면 전처럼 윤이까지 셋이서 식사를 한다든가 하는 기회도 생기지 않을까?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나약한 태도를 보인다. 지금 성윤에게 지켜야 할 것이 윤이라면, 제게 지켜야 할 것은 성윤과의 관계였다. 비록 제가 성윤을 곤란하게 했어도, 성윤이 저를 필요로 하는 이상 만회할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 오늘은 윤이 아빠로 온 거 아니고, 그냥 최성윤으로 온 건데.”
그리고 아주 다행히도 제 이기적인 희망에 성윤은 보답해 주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비는 더없이 반갑다. 마른 땅을 시원하게 적셔 타 죽어가던 메마른 땅에 숨 쉴 구멍이 된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달가워하는 비라도,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더군다나 달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입을 싹 닫는다. 그렇다고 한들 장마가 끝나고 다시금 가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비를 기다린다. 비록 두어 달 후의 자신이 장마로 인해 입게 된 피해를 또 한 번 호소할지라도 말이다.
장준과 성윤의 관계도 이와 같다. 화를 부를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갈증을 해소해 줄 사람을 끝없이 찾는다. 피해를 당한 후에야 후회하고 장마가 멈추길 바란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말라 가뭄이 슬금슬금 얼굴을 비추면, 또다시 저를 시원하게 적셔 줄 장마를 기다린다. 잠깐의 시원함 이후에 또 한 번 후덥지근한 여름이 찾아온다 해도.
삼 년 가뭄을 견뎌도 석 달 장마에는 못산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