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망 묘사.
Love Haze
10x
딸랑- 종소리에 계산대에 엎드려있던 장준이 고갤 들었다. 오랜만의 손님이었다. 주황색과 자주색 등산복 차림에 커다란 스키용 고글을 쓰고 마스크를 여러 개 덧댄 얼굴의 손님. 와 저 차림으로 용케 오셨네. 장준이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리며 남자를 주시했다. 저게 나름대로 효과는 있는 건지 이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식식 숨소리만 제외하면 편의점을 둘러보는 모습이 예전처럼 꽤 평화로울 정도였다.
한참 매대 앞을 서성거리던 남자는 결국 컵라면 두 개와 소세지 하나를 들고 계산대로 돌아왔다. 물건을 확인한 장준이 바코드를 찍을 생각도 없이 가만히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의 시선이 흔들린다. 이제 보니 계산대의 포스기는 전원도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 참, 전기가 없구나. 남자가 자진해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꺼낸 것은 꼬깃한 천원 세 장과 동전 몇 개였다. 우물쭈물 거리는 손을 장준은 힐끔 내려다보다가 활짝 웃었다.
“돈은 안 받는데요.”
“예? 그, 그럼...”
남자가 조심스럽게 돈을 거두었다. 설마 그냥 가져가라는 말인가. 그런 긍정적인 생각이 얼굴에 번지는 게 빤히 드러났다. 웃겼다.
“아 문에 붙여놓은 거 못 보셨구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제가 급하게 닫고 들어온 문을 바라봤다.
‘물물 교환만 가능’
물, 물.. 교환... 띄엄띄엄 글씨를 읽는 목소리가 편의점 안에 맴돌았다. 장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저흰 물물 교환만 받거든요. 뭐 가져오신 거 있으세요? 남자가 다시 장준을 쳐다보자 흔들리는 가방이 가볍다. 그는 크게 당황한 기색을 비치며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 드릴만한 게 없는데...”
장준이 고개를 쭉 내밀어 함께 가방 안을 들여다봤다. 밧줄, 손전등, 쓴 건지 안 쓴 건지 모를 건전지, 장갑 같은 게 자질구레하게 들어있었다.
“밧줄 괜찮은데요.”
“이건 좀... 저도 필요해서...”
“흐음,”
남자가 방어적으로 가방을 사수하자 장준이 다시 몸을 물렸다. 그 외엔 마땅한 게 없었다. 어떡한담. 팔짱을 끼고 우스꽝스럽게 고민하는 표정은 짓는 사이 남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가늘게 눈을 감은 장준이 그걸 눈치 챘을 리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대로 계산대 위에 있던 물건을 쓸어 챙긴 남자가 황급히 문으로 내달렸다. 어어, 아저씨! 소리 지르는 장준의 목소리에 일말의 죄책감도 안 들었을까. 이 먹고 살기 힘든 시국에 말이야. 경악에 찬 장준도 계산대를 박차고 남자를 쫓아 나섰다. 하지만 불과 오 미터도 안되는 짧은 거리다. 장준이 계산대를 넘어서는 사이 남자는 이미 문고리를 잡은 상태였다.
파지직- 문을 채 밀기도 전에 터진 충격음에 장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 또 혼나겠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매대 뒤에서 등장한 최성윤이 장준을 매섭게 째려봤다.
“하하, 사장님 오셨네.”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차렷 자세로 선 장준이 부러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성윤을 쳐다봤다. 성윤은 아랑곳 않고 쓰러진 남자의 몸에 한 번 더 전기충격기를 지졌다. 파지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기절한 육체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위험하다. 오늘은 유독 최사장의 기분이 언짢은 게 분명했다.
“아휴, 사장님 건전지도 아까운 놈이에요 이거! 제가 치울게요. 들어가 쉬세요.”
그러자 성윤이 쥐고 있던 전기충격기를 휙 들어 장준을 겨눴다. 표정이 퍽 살벌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던 장준이 다시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
“이장준 너 자꾸 이러면 해고야.”
“옙. 잘모트흐흠다!”
필살의 어버버 개그에도 웃지 않았다. 장준은 다시는 눈을 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물론 안구건조증으로 쓰디 쓴 눈물을 줄줄 흘리더라도 말이다.
-
그러니까 이 인류 최악의 재난이 벌어진 건 불과 석 달 전의 일이었다. 그 땐 한참 무더위가 내리쬐는 8월이었고, 기상청의 말에 의하면 곧 대한민국 전역에 장맛비가 쏟아질 예정이었더랬다. 이장준은 그 날도 성산동 골목 어귀에 위치한 어느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하고 있었다. 밤 열 시부터 아침 여섯 시. 출퇴근은 자전거로 15분. 적금 넣기 애매한 최저 시급에 그 좋아하는 술도 못 마시게 됐지만 장준은 행복했다. 밤샘 근무로 C 이상이 보이지 않는 성적표를 받았음에도 미친놈처럼 실실 쪼개고 다녔다.
“야, 장준아 들어가봐라.”
“어? 형! 또 거기서 잤어요?”
소리 없이 창고 문을 열고 나온 최성윤이 까치집이 된 머리를 툴툴 털었다. 옷은 어제도 입었던 검은색 츄리닝 차림. 명색이 편의점 사장인데 꼬라지가 영 백수 저리가라였다. 언젠가 지구 종말이 올 거라며 편의점 지하에 방공호 만든 오타쿠 백수. 어, 나열하고 보니 진짜 이상한 사람 같네. 엄밀히 따지자면 백수가 아니었지만 아무튼. 저건 이제 그냥 집인가? 지구 종말이 언제 온다고... 장준은 저도 모르게 성윤이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방공호에서 자는 상상을 하곤 풉 웃음을 터뜨렸다.
“?”
실없는 짓을 용납하지 않는 최성윤이 눈을 치켜떴다. 아이고. 장준이 부랴부랴 매대에 있던 비타오백을 하나 까서 성윤의 손에 쥐어줬다. 니가 뭔데 이걸 맘대로... 이게 무슨 2000년대 인터넷 소설도 아니고 눈썹까지 꿈틀거리는 최성윤에 아이 제가 삽니다요, 하고 아양 좀 떨었더니 그래도 꼴딱꼴딱 잘만 마셨다. 그런데 오전 교대는 최성윤이 아니라 다른 알바생이었다.
“갑자기 일 생겼다고 못 온대.”
“에엥?! 그 자식 그거 어이없네?! 그냥 제가 오후까지 볼까요?”
“씁, 됐어. 퇴근해.”
“아니 형 힘들 텐데...”
“시끄럽게 하지 말고 빨리 좀 가라.”
더 있다간 복싱 한 달 배우고 때려친 주먹에 후드려 맞을 것 같아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그렇게 순순히 가는 척 해놓고 속으론 오후에 일찍 나와서 점수 좀 따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씰룩이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앙 다문 표정이 웃겼다.
“아, 장준아,”
“넵?”
“이따 비 온다더라. 올 때 내 우산도 하나만 챙겨줘.”
알겠다는 말과 이따 보자는 말을 세 번씩 복창한 이장준이 힘차게 가게 문을 열었다.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올려다 본 하늘은 지나치게 맑았다. 비 오는 거 맞나? 아직 7시도 안됐는데 하얗게 번진 햇빛이 후덥지근했다. 가게 바로 옆에 걸어둔 자전거를 챙기고, 품에서 버즈를 꺼내 귀에 착 꽂았다. 음, 이 안정감. 힘차게 페달을 굴리는 골목길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창 밤에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었지만 어쩌다 의도치 않은 미라클 모닝에 길들여진 이장준은 이 풍경을 맘에 들어 했다. 원체 말 많고 시끄러운 사람이지만 나름대로 사색과 정적을 즐길 줄도 아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대충 라면을 끓여먹었더니 어느 새 8시가 코앞이었다. 최성윤은 분명 3시쯤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거다. 그럼 지금 자도 6시간... 어후 빨리 자야지. 대충 굴려 놓은 이불을 펄럭거리며 장준이 잠자리에 누웠다. 싸구려 블라인드가 걸린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쓸데없이 방안을 다 비췄지만 이것 또한 익숙한 것이라 큰 상관은 없었다.
그랬는데,
쿵!!! 콰과광! 삐용- 삐용- 빵!!! 빠앙-!! 장준이 막 잠에 들기 시작할 무렵 엉망진창의 파열음이 몰아쳤다. 잘게 흔들리는 낡은 원룸 건물의 진동은 덤이었다. 아 시발 뭐야. 인상을 찌푸린 장준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체 어디서 전쟁이라도 났는지, 아님 무허가 공사라도 조지는 건지 쿵쿵 거리는 소리가 계속됐다. 미친놈들 꼭두새벽부터 뭔 짓거리야... 중얼중얼. 잠꼬대처럼 욕을 뱉으며 장준은 손을 뻗었다. 머리 맡에 둔 가방에 손을 쑥 집어넣으니 둥그스름한 갤럭시 버즈가 딸려 나왔다. 역시 귀에 착 꽂히는 커널형의 이어팁. 삼성 레알 짱이다. 재용쓰 돈 많이 벌어요. 또 중얼중얼. 맥락 없이 대기업을 예찬하는 것은 그의 쓸 데 없는 버릇 중 하나였으므로.
이미 소음은 많이 죽었는데 거기에 노래까지 틀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고요였다. 편안해진 얼굴로 베개에 머리통을 비빈 장준이 금세 또 잠에 빠져들었다. 애석하게도 굉음은 점점 커져갔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행복한 얼굴이었다.
-
롸..팜팜... 롸...팜팜.. 으음 이게 무슨 소리지? 먹먹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장준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바로 제 눈앞에서 핸드폰이 열심히 울어대고 있었다.
“4시...”
장준이 베개에 반쯤 파묻혀있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엥? 그러자 소리가 조금 선명해졌다. 롸! 팜팜, 롸! 팜팜. 오른쪽 귀엔 여전히 버즈가 끼워져 있었는데 배터리가 다 됐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반대편 귀엔 그 짝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헐 안돼! 다행히 이불을 털자 데구르르 굴러 나왔기에 장준은 안심했다. 이제 후다닥 성윤이형한테 가야했다. 양치하고, 세수하고, 옷 입고- 핸드폰 챙기고, 방전된 버즈도 일단 챙기고... 다 됐나?
“아, 참”
나가기 전에 거울 한 번 더 보고 멀끔한 얼굴, 좌우 구렛나루 체크까지 완료. 아끼는 운동화 챙겨 신고 집을 나온 장준이 고개를 갸우뚱 젖혔다.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눈앞엔 어두컴컴한 복도가, 등 뒤로는 텅 빈 원룸의 문이 닫혔다.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발소리가 왕왕 울렸다. 장준의 집은 3층이었다. 매 층마다 켜져야 할 센서등은 오늘도 고장이었다. 애매하게 컴컴한 바닥으로 발을 내딛으며 장준이 다급히 현관문을 밀었다.
‘우산 하나만 챙겨줘.‘
까먹고 있던 최성윤의 목소리가 뇌에서 귀로 빠져나옴과 동시에 눈앞으로 희뿌연 안개가 가득 찼다. 이게 뭐야. 당황한 장준이 마구 손을 내뻗었다. 그를 둘러싼 안개가 흩어질 듯 말 듯 손길을 따라 부유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 듯 했다. 다시 3층으로 올라가긴 싫었던 이장준은 결국 우산 없이 최성윤에게 가기로 한다. 딱 한 걸음 내밀 공간만 겨우 보이는 하얀 세상이었다.
철컹. 그 와중에도 자전거는 챙긴 장준이 익숙한 방향을 향해 자전거를 질질 끌었다.
툭. 그리고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바퀴에 뭔가가 채였다. 그냥 넘어 가기엔 크기가 꽤 컸던지라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였다. 뭔가 시커먼 게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대로 쭈그려 앉은 장준이 손을 뻗었다. 아스팔트만 잔뜩 깔린 골목길에 있을 만한 게 뭐가 있냐. 쓰레긴가. 손에 뭔가 축축한 것이 닿았다.
“흐어억 무뭐머뭐야!!”
휘릭 돌아 제 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시체에 장준이 기겁하며 뒤로 넘어갔다. 자전거가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설마 하고 살펴본 손바닥엔 끈적한 피가 묻어있었다.
“저, 저기요? 저기요!!”
장준은 정의감이 투철했다. 이 기묘한 상황에서도 저를 놀래킨 시체의 안위를 걱정했다. 미디어에서 본대로 이미 창백하게 질린 남자의 맥박과 숨을 확인했다. 남자의 희뿌연 동공은 아무런 저항 없이 열려 있었다. 없다. 살아있다고 판단할 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깜깜한 안개만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 말고도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침묵. 아무리 평일 오후 네 시라지만 이렇게 조용할 수 있는 건가? 등에 작게 긴장이 일면서 근육이 수축했다. 이제 믿을 건 촉각 뿐이었다. 더러워진 손을 바닥에 벅벅 닦아낸 장준이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권 이탈’
키패드에 눌린 최성윤의 열한 자리 숫자는 끝끝내 그에게로 연결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최강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뉴스라도 봐야겠는데 인터넷이 없으니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문득 잠들기 직전에 들려오던 굉음이 떠올랐다. 설마 이 안개 때문에 사고가 난 건가? 그거라면 말이 된다. 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이라면. 자전거를 일으켜 세운 장준이 걸음을 옮겼다. 최성윤은 괜찮을 것이다. 뜬금없이 덤프트럭이 나타나 가게를 덮치지 않는 이상 그 또라이가 설치한 방탄유리는 무사했을 것이고, 설령 깨졌다 한들 그에겐 날렵한 몸도, 방공호도 있다. 그리고 이장준도 있지.
장준의 목적지는 여전히 최성윤의 편의점이다. 10보에 한 번씩 발에 채이는 것은 무시하기로 했다. 과감하게 바퀴를 굴려, 보폭을 넓혀 그것을 뛰어넘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방향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끔 길을 가로막은 자동차가 있으면 힘자랑하듯 자전거를 번쩍 치켜들고 본네트를 쿵쿵 밟았다. 그나마 이 어중간한 어둠을 인식하고 깜빡거리는 가로등이 장준에겐 이정표였다.
-
몇 분이나 지났지? 이런 재난 아포칼립스에서 으레 그렇듯 시계가 되어버린 핸드폰엔 4시 21분이라는 숫자가 덜렁 남아있었다. 아직 출발한지 십 분도 안됐다니. 통제된 시야와 느린 걸음 때문에 시간이 더뎠다. 슬슬 왼쪽으로 꺾어야 할 때가 됐는데.
“으아악!! 아악!!!”
비명소리. 장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 목소리가 뭔가 기묘했다.
“흐아악, 아윽! 악!!!”
이장준은 맹세코 최성윤이 소리 지르는 걸 본 적이 없지만. 만약 그가 악을 쓴다면 딱 어울렸을 법한 소리였다. 최성윤의 목소리였다. 억척스럽게 부여잡고 있던 자전거가 쿵 무너졌다. 장준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개 속으로, 이미 안개 속이었지만 더 알 수 없는 그 너머로 뛰어들었다. 신음 소리가 점점 커진다.
“형!!”“
희뿌연 안개 속에서 거뭇거뭇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오로지 그 등만 보고 뛴 탓에 발에 뭐가 걸려 퍽 넘어졌다. 아무래도 사람 시체 같았는데 이장준은 1초도 안 되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장님!”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최성윤은 저렇게 크거나 혹은 작거나, 지나치게 곧거나 심하게 굽어져있지 않았다. 남자의 몸이 울렁거리며 흔들렸다. 장준의 손이 몇 번 허공을 휘젓다가 겨우 그의 어깨를 낚아챘다.
“헉,”
놀란 두 눈이 마주쳤다. 씨이이이발. 욕지기를 뱉는 목소리가 걸걸하다. 최성윤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괜찮으시냐고. 어디 다치셨냐고. 이 와중에도 이성과 예의를 양손에 꼭 붙잡은 이장준은 그렇게 물을 예정이었다.
“이이, 개-새끼야!!!! 와!!!!! 와봐이씨!!!”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야구배트를 휘둘렀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장준이 팔을 감싸며 멀어졌다. 남자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는데 그 밖에도 뭔가 이상했다. 남자의 하얗게 질린 동공이 위로, 위로... 장준의 머리를 넘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뭘 보는 거지? 소름이 끼친 장준도 덩달아 눈을 치켜떴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안개 뿐이다.
“저기 진정 좀 하시고...”
장준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남자를 달랬으나 남자는 한사코 위를 쳐다봤다. 그리고,
“컥,”
남자의 목이 움푹 들어갔다. 들이키던 숨이 목에 걸려 고통스런 소리를 냈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목을 잡고 조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보이는데. 땡그랑- 남자의 손에서 야구배트가 떨어져 나가고서야 정신을 차린 장준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정신차려요!! 투명인간을 상대하듯 손을 뻗는다. 그럴 리가 없었다. 주먹 쥔 손아귀 사이로 하얀 안개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남자는 여전히 고통스럽게 제 목을 긁었다. 그의 안색이 점점 파래진다.
이장준이 남자의 목을 덥썩 잡았다. 대체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젠장. 남자의 뺨을 치고, 소리도 질렀지만 숨이 점점 희미해졌다. 끝내는 거품낀 혀가 길게 늘어져 나왔다. 허망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던 남자를 받아낸 장준이 대신 숨을 몰아쉬었다.
“저기요. 저기요!”
미처 감지 못한 남자의 눈이 허망하게 장준을 올려다봤다. 마치 안개처럼 하얗게 물든 눈. 장준은 남자의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초롱초롱한 눈이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이게 뭔진 몰라도, 최성윤에게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은 확실했다.
-
사장님은 괜찮을까? 뽀송하던 이장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안개 속은 여름이라기엔 시원하고, 가을이라기엔 미지근한 온도였다. 마치 사람의 체온 같았다. 지극히 같은 온도. 이장준은 정처 없이 길을 헤맸다. 사람이 죽는 광경을 직접 보고 나니 속이 메스꺼워서 헛구역질도 여러 번 했다. 조심성을 잃은 나머지 차며 건물이며 여기저기 치이는 횟수도 늘었다. 그런 장애물 중 대부분은 바닥에 널린 시체였다. 열세 번째, 넘어질 뻔한 몸을 바로 잡은 장준이 제 뺨을 철썩 쳤다. 미친 새끼야 정신 차려. 쟁쟁하게 울린 마찰음과 얼얼한 통증에 눈이 또렷해졌다. 벽을 더듬어 간판을 찾는다.
새싹곱창
새싹곱창! 새싹곱창이다! 가끔 알바 끝나고 성윤이형이랑 술 마셨던 거기. 굳게 닫힌 문을 따라 장준이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편의점으로 가려면... 생각보다 멀지 않다. 세 번 정도 모퉁이를 돌면 될 일이었다. 다행이다.
자신감을 얻은 장준이 풀쩍 뛰어다니며 안개 속을 파헤쳤다. 훅훅 내쉬는 숨 때문에 코앞의 안개가 일렁였다. 그런데 이거 독가스는 아니겠지...? 마셔도 되는 건가? 바보 같은 타이밍과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밖을 돌아다닌지 벌써 30분은 족히 넘었을 시간이다. 이장준은 마치 고장난 텔레비전을 고치듯 규칙적으로 제 머리를 때렸다. 설상가상으로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는 듯 했다.
“어?!”
일순 걸음을 멈춘 장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곤 갑자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엔 무언가를 잡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역으로 밀어내는 행동이었다. 힘줄이 툭 불거진 그의 팔뚝이 공중에서 스르르 미끄러졌다.
“싸장님~!”
제 고용주를 우렁차게 부르며 장준이 어질러진 거리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하얀 안개 속에 그가 찾는 최성윤은 없는데도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어딘가를 직시하고.
“형...?”
장준의 얼굴이 급격히 사나워졌다.
“성윤이형?!!!”
이장준이 뜬금없이 옆에 쓰러져 있던 오토바이로 달려가 소리를 질러댔다. 축축한 바닥에 엉망으로 주저앉았다. 오토바이 엔진에서 줄줄 새어나온 기름 때문에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도 아랑곳 않는 눈치였다. 그는 한껏 절망스러운 얼굴로 허공을 헤집었다. 형 정신차려!! 형!!! 왁왁대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빌라 창가에 인영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내려다본다 한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으리라.
“씨발 형!!! 최성윤!!!!! 아, 아아악!!!”
허상 같은 안개에 대고 심폐소생술을 반복하던 장준이 결국 몸을 웅크리고 주먹을 갈겼다. 탁! 탁! 그닥 폭발적이지 않은 애석한 마찰음이 아스팔트 위로 여러 번 꽂힌다. 하얗게 눈이 오염된 장준은 급기야 거기에 대고 머리를 박았다. 퍽! 퍼억! 이제 꽤 위험해 보이는 충돌에 검은 아스팔트 위로 핏자국이 번졌다. 기름 냄새, 피 냄새. 뿐만 아니라 눈물에 콧물까지 더해졌다. 이장준은 그렇게 종에 머리 박는 까치처럼 뒈져버리고 싶었다.
“아 시발, 야! 이장준!”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장준의 어깨를 잡아챘다. 우악스럽게 행위를 이어가는 머리통을 두 팔로 꽉 끌어안고 품에 가뒀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가 양쪽 귀를 막자 가까스로 펄떡거리는 제 심장이 느껴졌다.
“미친놈아 정신 차려!”
“형... 형......”
어질어질 머리를 흔든 이장준이 몽롱한 눈으로 바닥을 한 번, 저를 끌어안은 남자를 한 번 쳐다봤다. 하얀 방호복에 노란 고무장갑, 새까만 방독면.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한 듯 완벽하게 무장한 저 차림은, 제가 아는 한 지구상에 딱 한 명 뿐이었다.
“사장님...?”
장준의 몸에서 힘이 빠지자 겨우 머리통을 놓은 최성윤이 한 번 더 욕을 박았다.
“새끼야 빨리 일어나! 이거 잡아!”
난생 처음 전쟁터에 떨어진 군인처럼 이장준은 어리버리 까면서도 최성윤이 주는 밧줄을 단단히 잡았다. 덤으로 성윤의 손도 꼭 잡고 힘을 줬다. 아! 신경질적인 신음 소리를 들으니 드디어 악몽에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물론 여전히 기괴한 안개 속이었지만 손아귀의 최성윤 정도는 현실이었으니까.
-
딸랑- 익숙한 소리가 들리자 장준이 완전히 눈을 떴다. 편의점이었다. 안개에 침식당하지 않은 평소 그대로의 편의점. 검은 방독면의 형태가 더욱 또렷하게 잘 보였다. 성윤은 들어오자마자 열심히 문을 잠그고 있었다. 여전히 손에 걸린 밧줄을 꽉 움켜쥔 채 이장준이 그를 응시했다.
“성윤이형,”
“...”
“진짜 형 맞아요?”
문틈으로 연기가 새진 않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최성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칠게 방독면을 벗어낸 얼굴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리고 표정. 장준은 그것을 마주함과 동시에 제게 꽂힐 폭언을 직감했다.
“이 미친 새끼야 어딜 기어 나와?! 씨발 왜 싸돌아다니는 거지? 어? 사람들 죽는 거 못 봤어?!!”
말하다가 더 성질이 났는지 결국 들고 있던 방독면도 바닥에 내팽개쳤다. 어어, 형 조심해요. 주섬주섬 방독면을 주워들고 어디 부서진 데 없나 살피는 제 모습이 최성윤의 화를 더 돋군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뿌드득. 노란 고무장갑에 옹골차게 힘이 들어갔다.
“...아니 저 방금 일어나가지고.”
“뭐?”
“자다가... 방금 일어나서 나온 건데욥...”
말끝에 입을 합 다문 이장준이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황당한 얼굴로 그걸 마주 보던 최성윤도 이장준이 오늘 아침까지 일하다가 자러 들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듯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난리통에 쳐잤다고?! 건물 무너지고 차 폭발하고 난리가 났었는데?
“갤럭시버즈가 노이즈 캔슬링이 죽여요.”
“이 시발,”
주먹을 확 치켜든 성윤이지만 정말 때리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이장준의 마빡에서는 이미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발견했을 때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지.
“아... 아아, 아아악!”
성윤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물론 눈치 없는 이장준은 그걸 또 말린답시고 손을 댔다가 명치를 한 대 맞았다. 성윤이 개고생한 것에 비하면 싸게 먹힌 편이긴 했다.
한 대 치고 나니 좀 진정이 됐는지 급 차분해진 얼굴로 돌아온 최성윤은 카운터 아래서 구급상자를 가져와 장준의 상처를 치료해줬다. 눈 감아라. 옙. 고분고분하니 잘 생긴 얼굴 위로 커다란 거즈를 붙이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장준아, 밖에 얼마나 있었냐.”
“저... 한 30분...?”
“하,”
성윤의 한숨에 장준이 눈을 힐끔 떴다. 눈 감아. 옙.
“장준아, 너 자는 동안... 아니 그냥 저 안개에 들어가면 안 돼. 저기선 숨도 쉬면 안 되고, 눈도 뜨면 안 되고 귀까지 막아야 돼. 어쩌면 피부도 싸매야 돼, 어? 저거 독이라고 독. 사람들 환각 보고 돌아버리게 만드는 안개란 말이야.”
“헐. 어쩐지.”
장준의 시답잖은 리액션에 성윤이 입을 달싹였다. 너 뭐 봤어? 그 질문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손이 멈춘 것을 눈치 챈 이장준이 슬그머니 눈을 뜨고 그 멀건 얼굴을 바라봤다. 형이 처참히 죽어가는 환각을 봤다는 건 말 안하는 게 낫겠지...? 말했다간 더 좆같을 수도 없는 성윤의 기분이 잡칠 게 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털고 일어난 장준이 애써 편의점 안을 둘러봤다.
“그래도 여긴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
뒤에서 말없이 구급통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준이 머쓱하게 볼을 긁으며 매대 옆으로 들어갔다. 쩍, 쩍, 신발 밑창이 진득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누가 여기 주스라도 흘렸나. 세모눈을 하고 바닥을 내려다본 장준은 제가 여전히 꿈이라도 꾸는 걸까봐 볼을 꼬집어야 했다.
“형!!”
아, 맞다. 아차한 성윤은 그 부름을 무시했다. 그런다고 조용해질 놈이 아니었지만 대꾸해준다고 덜 시끄러울 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피 뭐예요?!”
장준이 과자 매대 앞으로 드문드문 찍힌 핏자국을 삿대질했다.
“형 어디 다쳤어요?!”
“그거 내 피 아니야.”
하지만 의심 많은 이장준은 망설임 없이 최성윤의 몸을 더듬었다. 힘없이 딸려오는 어깨를 잡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어차피 힘으로 승부하면 당해낼 재간은 없어서 만족할 때까지 몸을 내준 성윤이 이제 됐냐는 표정으로 장준을 쳐다봤다. 그제야 자기 피 아니라던 성윤의 말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럼 누구... 물으려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사그라 들었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사망플래그가 설 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그 피에 얽힌 일화는 성윤에게 있어 큰 비밀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 같이 지내야 할 이장준이 꼭 알고 있어야 할 부분이라면 모를까.
-
이 사태가 발발한 시각 8시 21분 경, 최성윤은 역시 편의점 카운터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4시간이나 앞당겨 깨워진 몸은 노곤했고, 눈이 조금 건조한 상태였다. 편의점 내부엔 출근 전에 간단한 아침을 사먹는 단골 회사원이 하나 있었고 성윤까지 합쳐 총 두 명 뿐이었다. 오전 늦게부터 비가 온다던 하늘은 웬일인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성윤은 이따금 늘어지게 하품을 뱉었다. 잠 깰 동안이라도 이장준을 보내지 말 걸 그랬나, 하는 되도 않는 후회도 들었다.
“이거 계산이요.”
한참 냉장고 앞을 서성거리더니 결국 늘 먹는 단백질 음료와 샌드위치를 집어든 남자가 카드를 내밀었다. 5200원입니다. 건조한 말투는 익숙한 인사였다.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시선을 들어 창밖을 내다보던 회사원이 고개를 꺾었다.
“안개인가?”
그저 잘 들리는 혼잣말이었기에 최성윤은 묵묵히 카드를 긁는 중이었다.
“어어,”
조금 격앙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쯤에서야 성윤도 남자가 뭘 보고 있는지 궁금해져 고개를 들었던 것 같다. 금방까지 쾌청하던 풍경이 마치 꿈처럼 하얗게 뒤덮여있었다. 멀리서 알 수 없는 소음덩어리가 다가온다.
“뭐야.”
삐- 잘 돌아가던 포스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거래 불가 표시가 화면 정중앙에 떠오르고, 미처 다시 결제할 생각은 못한 채 성윤이 남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안타깝게도 정갈하게 세팅된 넥타이를 풀어낸 회사원에게 그걸 받을 만한 정신은 없었다.
쿵, 쿵, 잘은 진동에 바닥이 떨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남자가 홀린 듯 유리창으로 다가갈 동안 성윤은 곁눈질로 방공호까지의 걸음을 셌다. 아무래도 단순한 사고는 아닌 것 같았다. 소리들이 점점 커진다. 점차 선명해지는 그것은 충돌음과 폭발음,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였다.
“꺄아아악!!!”
“흐억,”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편의점 안으로 남자와 여자 두 명이 뛰쳐 들어왔다. 아 시발 문 잠글 걸. 활짝 제껴진 출입문으로 달려들어 뒤늦게 문을 닫은 성윤이 옷소매로 입을 막았다. 두 사람을 따라 조금 새어 들어온 안개가 하늘하늘 퍼져 사라졌다. 있는대로 미간을 찌푸린 성윤이 손을 떼지 않은 채 불청객들을 노려봤다. 그런데 새로 온 남자의 상태가 이상했다.
“아아, 아아아!! 안돼 안돼!!”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손을 휘젓는 모양새가 꼭... 눈 먼 사람 같았다. 저기요. 괜찮아요? 조심스럽게 다가간 회사원이 그 얼굴을 들여다봤다. 남자가 번쩍 고개를 쳐든다. 꼭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눈이, 내 눈...! 안 보여! 아악!!”
마치 하얀 물감을 풀어놓은 것 마냥 뿌연 동공을 남자가 벅벅 긁었다. 눈꺼풀에 생채기가 나고 피가 맺히기 시작한다. 일단 진정하세요! 회사원이 남자를 말리는 동안 성윤은 또 다른 불청객을 살폈다. 여자는 덜덜 떠는 폼으로 남자의 행동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는 별 달리 이상해보이지 않지만 단언할 수는 없다.
“저기요. 밖에 무슨 일이에요?”
“그, 그게...”
여자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성윤을 올려다본다. 분홍색 입술이 확신 없이 달싹거렸다.
“커다란... 공룡같은 괴물이...”
횡설수설하는 게 확실히 정상은 아닌 듯 했다. 조용히 걸음을 옮긴 성윤이 카운터 서랍을 뒤적였다. 일단 방독면이랑...
“꺄악!!”
잠깐 눈을 뗐을 뿐인데 비명과 함께 쿠당탕 매대 쓰러지는 소리가 터졌다.
“이봐요!”
황급히 방독면을 쓴 최성윤이 오른손엔 무언가를 챙겨 들고 사람들 쪽으로 다시 달려갔다. 패닉에 빠진 남자가 두 사람을 밀친 듯 했다. 이런 젠장. 회사원은 큰 타격 없이 일어났지만 여자는 아니다. 매대 모서리와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는지 핏자국과 함께 미동 없이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흐아악,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이 사단을 낸 시발새끼는 역으로 살려달라고 빌고 있다. 환멸이 났다. 금방까지 적극적으로 남자를 제지하던 회사원도 이제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멍하니 여자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눈이 안보여요... 갑자기 안보여...”
파지직- 더 듣기 싫어서 전기충격기를 지졌다. 묵직하게 쓰러지는 남자를 두고 성윤이 한숨을 내쉰다. 회사원은 잠시 놀란 듯 했으나 이내 그게 적절한 조치였다고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웃기고 있네. 파직! 바닥으로 쓰러지는 또 하나의 인간을 보며 성윤은 방독면을 더 단단하게 조였다. 밖에 나가려면 방호복도 챙겨 입어야겠지.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혹시라도 깨어나지 못하도록 전기충격기를 한 번씩 더 먹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어제 먹은 저녁밥 얘기하듯 무덤덤한 성윤의 목소리에 장준은 머리나 벅벅 긁었다. 최대한 무해해 보이기 위함이었다. 생각 없이 따지고 들었다간(사실 따질 이유도 없다) 저도 그들처럼 기절한 채 밖에 버려질 것 같아서. 그러다 마침내 끝이 나 버린 이야기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장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사장님 진짜... 나이스샷...!”
“......”
하하. 멋쩍게 웃는 이장준의 입꼬리가 떨렸다. 에이 그래도 우리 알고 지낸 시간이 있는데, 우리 적어도 친구 이상 연인 이하 그 쯤은 될 텐데 에이 설마.
“장준아,”
“넵?!”
최성윤의 얼굴이 이렇게 싸늘해 보이긴 또 처음이다.
“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죽던 말던 알 바 아니야.”
“예...”
“가장 우선은 내가 사는 거야. 알겠지?”
“...넵.”
이장준은 속으로 또 말을 삼켰다. 그래서 이제 저를 죽일 거냐고. 아니면 혹시 나중을 위한 비상 식량인 거냐고.
최성윤은 이장준을 죽이지 않았다. 기절시켜 내다 버리지도 않았고, 심각한 얼굴로 머리 굴리는 게 다 티가 났지만 굳이 말을 얹지도 않았다. 뭘 생각하는지 뻔한데 굳이 넌 쓸모 있으니까 하는 말은 감추고 싶었다. 괜히 또 들떠서 설치면 사고나 칠 것 같고... 뭐, 정말 힘 하나는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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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하룻밤 자고 나면 금세 사라져버릴 줄 알았던 하얀 안개가 무려 한 달이 넘도록 도시를 꽉 채웠다. 지구 멸망이 언제 오냐고 내심 최성윤의 벙커를 무시했던 장준은 이제 그 벙커 침대 끝에 곱게 누워있었다. 어쩌면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이, 중국에 미국까지 뒤덮였을까? 전파가 끊긴 지금 상황에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가끔 편의점을 오고 가는 단발성 손님들의 카더라 하는 말들이 장준과 성윤의 유일한 소식지였다.
최성윤은 다른 사람을 살리지 않겠노라 말했지만 나름의 룰은 있었다. 일 번, 물건을 팔 땐 무조건 물물교환. 이 번, 영업 시간은 아침 열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삼 번, 식사는 하루 두 번 편의점 매대에 진열된 식품 위주로 유통기한이 임박한 순서로 먹어야 했고, 사번, 지하 벙커에 대한 것 말하지 않기였다. 벙커의 비밀번호는 18728이었는데 일부러 의미 없는 숫자를 넣어놨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시국에 손님이 올까요?”
“이 시국이니까 오지.”
장준은 시큰둥했지만 성윤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첫 일주일 동안은 장준의 말대로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매대를 어슬렁거리다가 종국엔 통유리 앞에서 멍하니 바깥을 쳐다보는 와중에도 편의점은 고요했다. 결국 찔끔찔끔 아껴 쓰던 핸드폰 배터리마저 다 떨어졌다. 발전기를 돌리려면 성윤의 허락을 맡아야했다.
“미쳤냐?”
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이장준은 껄껄 웃으며 농담이라고 쓰레기가 된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한 일주일 더 지나면 세상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면서.
그리고 이주가 채 되기 전 어느 날, 밖에서 차소리가 들렸다. 낮게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였다. 오후 2시. 벙커에 내려가 책을 읽던 최성윤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어, 형 왜요? 카운터에 엎드려 있던 장준은 이 왕왕 울려대는 차소리보다 성윤의 기척에 반응했다.
“차소리 들리는데.”
“에?”
그러네.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장준의 말에 성윤은 좀 찝찝해졌다. 쟤를 믿고 맡겨놔도 되는 건가. 물론 정답은 아니오 였는데 그렇다고 제가 카운터를 지키긴 싫었으므로 함구했다.
자동차는 느리게 거리를 배회하는가 싶더니 이내 편의점 통유리에 대고 강렬한 쌍라이트를 비췄다. 으악 내 눈. 눈을 질끈 감은 이장준과 오기로 눈을 부릅 뜬 최성윤. 문에는 바깥에서 보이도록 붙여둔 큼직한 안내문이 있었다.
‘이시국 영업합니다.’
부르르 소리와 함께 빛이 꺼졌다. 탕- 차 문 닫히는 소리도 오랜만이다. 딸랑- 저 종소리도.
“어서오세요-”
지구 종말과 어울리지 않는 이장준의 영업용 목소리가 이시국 첫 손님을 반겼다.
-
편의점 라이프는 의외로 순탄했다. 다들 물물교환이란 시스템에 당황하면서도 금세 납득하고 적응했기 때문이었다. 들어오는 물건은 망원경이나 달력, 보드게임 등등 대개 생존에 필요하다기보다 여흥에 필요한 것들이다. 웬만한 물건은 이미 최성윤이 벙커에 준비해놨기 때문이었다. 이장준은 차라리 나중을 위해 금으로 받으면 어떠냐고 물었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형 이러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면요.”
“그 땐 그 때고.”
“...사실 진짜 재벌 3세죠.”
최성윤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장준만 조금 심각해졌다. 성윤이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고 대출에 적금까지 깨서 지은 저 벙커가 할 짓 없는 재벌 3세의 놀이터가 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저 혹시 성경도 괜찮을까요?”
이상한 손님이다. 목숨을 걸고 밖으로 나오면서 성경책을 챙긴 사람. 인자한 미소에 은근한 광기가 맴돌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장준이 어버버거리는데 옆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던 성윤이 벌떡 일어났다.
“네. 됩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초코바도 하나 더 얹어줬다. 이 형 기독교 아닐 텐데... 그럴 텐데? 이장준만 외계인이 된 것처럼 둘 사이에서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기쁘게 웃는가 싶더니
“아, 그런데...”
하며 제가 가장 아끼는 구절 한 장은 북 찢어갔다. 거기엔 대체 뭐라고 적혀 있었을까?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장준이 텁텁한 입맛을 다셨다. 최성윤은 어느새 그 성경책을 들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이런 난리통에도 신을 믿는 사람과, 또 그걸 순순히 받아준 최성윤이 이해가 안됐다.
“형 기독교였어요? 그래서 나 안 받아준 거예요?”
“뭐라도 읽을 거 있으면 재밌잖아.”
“재밌어요?”
“...여차하면 땔감으로 쓸 수도 있고.”
“그러다 벌 받아요.”
그 말에 성윤이 흐 하고 웃었다. 결국 최성윤에게 제일 재밌는 건 이장준인데.
한 문장 한 문장을 골똘히 씹어 넣는 성윤을 구경하던 장준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누가 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통- 통- 가벼운 울림과 함께 희뿌연 안개 사이로 창백한 손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문을 못찾아서 저러나. 잠시 성윤의 눈치를 살핀 장준이 터벅터벅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빨간 옷자락이 펄럭거린다.
“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피로 물든 셔츠 끝에 낡고 지친 최성윤의 얼굴이 있었다. 형. 나지막한 부름에 안에 있는 성윤도 밖에 있는 성윤도 대답하지 않았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마주친다. 숨인지 안개인지 모를 하얀 김이 유리창에 닿아 번졌다. 성윤이형. 이장준은 홀린 듯 유리창에 손을 얹었다. 왜, 왜 거기에.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너머로 최성윤도 손을 붙였다. 단 세 걸음만 옆으로 가면 문이 있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요. 장준이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뭐야. 또 손님이야?”
“헉,”
귀 바로 옆에서 파고드는 목소리에 장준이 눈을 떴다. 창밖엔 끝내 죽고만 최성윤의 시체가 남아있었다. 금방이라도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흔들리는 최성윤. 장준이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없다. 진짜 성윤은 제 옆에 있었다.
“잘못 봤나 봐요.”
대강 얼버무리는 말에 성윤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한가 보네. 이제 밥이나 먹을까. 오늘도 저녁은 옥수수 통조림 반이다.
-
안개 속 세상은 밤이 길었다. 낮이라고 특별히 할 게 없어서 그랬다. 비좁은 1인용 침대에 나란히 누운 성윤과 장준은 가끔 밤새도록 입을 맞추거나, 서로의 몸을 더듬거나, 그들 만의 방식으로 얕은 체온을 나눴다. 싸대기 맞을 걸 각오하고 먼저 손을 댄 건 장준이었는데 의외로 성윤의 제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최성윤에게 닿았다는 흥분감과 이런 사태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저를 받아들이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초조함이 번갈아가며 파도쳤다. 뭐, 그러면서도 할 건 다 했다. 매대에 남아 있던 콘돔들은 진열용 한 곽을 제외하고 벙커로 가지고 내려왔다. 역시 최성윤에게 제일 재밌는 건 이장준이라는 뜻이다.
“형 근데요.”
한바탕 섹스가 끝나고 지쳐 누워있는 최성윤에게 장준은 조잘조잘 말을 붙였다. 대꾸도 없는데 어쩜 저렇게 말이 많은지. 얄미운 조동아리를 때려주고 싶지만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서 계속 그 시끄러움을 방치해야 했다.
“지구 종말 오면 저랑 사겨준다면서요.”
“뭐?”
“예전에 새싹곱창에서 술 먹었을 때.”
그래.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했다.
“야, 생각해본다고 했지.”
정확히는 ‘지구 종말이 와도 내가 좋으면 생각은 해볼게’ 였다. 아 그걸 기억하시네. 장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예에? 아닌데요?? 분명히 나랑 사겨준다고 했는데. 지구가 망해서 우리 둘만 남으면 결혼하기로 했잖아요.”
우기면 장땡이었기 때문이다.
“아 또 시작이야...”
“우리 로맨틱하게 이시국 된 날부터 1일 하면 어때요?”
“미친,”
“그럼 오늘 벌써 42일째다.”
더 이상 듣기 괴로웠던 성윤이 끙끙대며 몸을 틀었다. 반대편은 차가운 벽이었지만 차라리 나았다. 벽은 말을 하지 않으니까. 형 잘 거예요? 잘 자요. 뒤에서 파고드는 투박한 손이 따뜻하다. 장준이 말을 멈추자 벙커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그리고 새까만 어둠. 성윤이 제 허리에 닿은 장준의 손을 겹쳐 잡았다. 이 사태가 언제쯤 해결될까. 그런 의미 없는 상상을 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
장준과 성윤이 사귀게 된지 63일. 그러니까 이 사태가 발발한지 두 달이 되었을 무렵,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마스크나 비상용 방독면 등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상황을 하나의 생태계로 받아들이고, 어슬렁거리며 걸어나와 주인 잃은 슈퍼에서 음식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편의점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이 빈 곳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긴 그게 일반적인 상황이긴 하지.
“어서옵쇼!”
“흐어억, 뭐 뭐야!”
놀라는 반응도 이젠 익숙했다. 성윤은 가만히 다리를 꼬고 앉아 혼자 체스를 두고 있었고, 장준은 곧은 자세로 카운터를 지켰다. 오늘의 손님이 된 남자는 그 진귀한 광경을 맘에 들어 하는 듯 했다.
“정부에서 현 상황을 무마할 화학병기를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구요. 이미 인도까지 당했다던데 테러가 아니라 자연 현상이라는 말도 있고...”
참 이장준 못지않게 말 많은 사람이다. 헐 정말요? 와, 대박이다. 열심히 리액션을 해주는 장준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편의점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와, 어디로 향하는지. 이 동네, 마포구의 생존자는 어느 정도 되는지, 성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궁금증은 늘 장준의 몫이었다.
“정부가 아직 남아있어요? 백신 같은 것도 만들고 있나? 아니 이거 백신으로 되는 건가...”
남자는 신나서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줄줄 읊었다. 물건을 사려던 것도 까먹은 것처럼, 지금 말하는 모든 게 그 편의점과는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인 양 굴어서 장준은 기분이 이상했다.
“자 그럼 건전지, 라면 네 개, 통조림 세 개... 많이 가져가시네. 결제는 뭐로 도와드릴까요?”
“이런 것도 되죠?”
헐 엠피쓰리! 장준이 덥썩 그것을 잡았다가 아차 싶어 성윤의 눈치를 봤다. 금방까지만 해도 관심 없는 척 책이나 보던 시선이 어느새 둘의 맞잡은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에 노래 얼마나 들었는데요?”
“최신 케이팝은 다 들어있고요. 옛날에 유행하던 팝송 좀 있어요. 천 곡은 넘을 걸요.”
성윤이 고개를 까딱 흔들자 장준이 확인에 나섰다. 진짜였다. 배터리는 반이나 남아있고 안에는 불법다운의 흔적이 보이는 요상한 파일명의 노래들이 줄줄이 천백일곱곡이나 있었다.
롸! 팜팜- 롸! 팜팜-
진짜네. 노래가 제대로 들리는 것까지 확인하자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코바 하나 더 얹어드려라. 진짜 귀한 손님한테만 주는 덤도 있었다. 남자가 활짝 웃으며 가방에 음식들을 쓸어 담았다. 다음에 또 올게요. 수 개월 전에나 듣던 인사인데 저 사람은 진짜 다시 올 것 같다. 딸랑- 하는 종소리에 하얀 안개가 소량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어, 시발,”
남자가 가고 매대를 확인하던 성윤이 욕을 뱉었다.
“왜, 왜요?!”
뜬금없는 욕지기에 놀란 장준이 한걸음에 달려온다. 저 새끼 콘돔 훔쳐갔어. 성윤이 텅 빈 콘돔 매대를 가리켰다. 분명 한 곽 놔둔 게 없어져서 이제 정직한 사람들의 이시국 성생활을 지켜줄 수 없게 됐다.
“와 진짜 이시국에...”
“......”
“이걸 훔쳐가네 와...”
차마 그의 성욕구까지 비난할 순 없는 입장이라 장준은 입을 다물었다. 어쩔 수 없지. 성윤이 묵묵히 콘돔 가격표를 버렸다. 이제 벙커에도 남은 콘돔은 스물여덟 개 뿐이었다.
-
“형, 아까 어떤 손님이 그러던데.”
“응.”
“안개 속에서 보는 거. 그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거래요.”
“뭔, 해리포터야?”
“해리포터가 그런 내용이에요?”
“아니, 거기에 나오는 어떤 옷장이... 됐다.”
성윤은 벙커에 해리포터 전권을 들여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설마 저랑 같이 살아남을 놈이 해리포터를 안 봤을 줄이야. 더 말하지 않고 눈을 감은 최성윤의 옆에서, 이장준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어둠 속 성윤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래서,”
“네?”
“넌 뭐가 보였는데?”
“......”
장준이 답지 않게 입을 다물자 성윤이 고개를 홱 돌렸다. 목을 좀 더 빼면 뽀뽀라도 할 수 있을 거리인데 그랬다간 정말 머리털을 뜯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빨리 말해. 몸을 꾸물거리면서 모서리쪽으로 밀어낸다. 벌써 장준의 엉덩이는 공중이 떠 있었다. 협박도 이런 협박이 없다.
“형이 죽는 거요.”
“...내가 널 죽이려고 했다고?”
“아니요. 죽어가는 형이었어요.”
어둠 속에서도 벙찐 성윤의 표정이 보였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이장준은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할 걸 싶었다. 성윤이 어이없다는 듯, 하지만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장준아 왜 내가 죽는 게 무섭냐?”
“...내가 형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런가보죠.”
생각 없이 뱉은 말인데, 그래서 그런가 최성윤이 얼굴을 구겼다. 뭐가 또 기분이 상했는지 목소리톤이 조금 높아졌다.
“이상해. 다른 걸 무서워해 봐.”
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 장준은 퉁명스런 대답을 삼켰다. 최성윤 바보. 멍청이. 결국 뽀뽀는 하지도 못하고 각자 눈을 감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어느새 딱딱한 바닥행이었다.
-
이 기묘한 생존 일기는 지나치게 담담한 최성윤 때문에 단순한 동거 같기도 했다. 대신 요리는 항상 인스턴트 음식이고, 오붓하게 영화도 못보고, 나란히 서서 양치도 못하는 동거. 오래 전부터 이 상황을 대비한 성윤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하루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분 좋지 않나. 전교생이 다 시험 공부 안 했는데 혼자 해 온 거 아니야 지금. 그렇게 따지자면 이장준은 전교 일 등 최성윤 옆에 앉았다가 우연히 답안지를 보게 된 학생1이다.
“형 진짜로 지구 종말이 오니까 어때요?”
“엉? 뭐... 그냥 그런데.”
시큰둥한 대답은 성에 차지 않는다.
“왜요. 그렇게 노랠 부르더니.”
“야, 내가 언제?”
“평범한 사람은 저런 벙커 안 짓거든요.”
성윤이 샐쭉한 눈으로 장준을 노려봤다. 웃기다. 삐죽 내민 저 입술에 키스라도 갈기고 싶은데 하필 둘 사이에 전쟁 중인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사막화나, 전쟁이나... 좀비 같은 거?”
“와 진짜 현실성 없다.”
“지금 이건 현실성 있냐? 체크.”
“아!!”
벌칙으로 변기 청소는 이장준이 하게 됐다. 아니 이겼어도 제가 할 거였지만... 스탠으로 된 변기를 벅벅 문지르며 장준은 또 생각했다. 과연 성윤이형이 무서워하는 건 뭘까? 아니 저 양반이 무서워하는 게 있긴 할까? 희번득한 귀신같은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아마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바퀴벌레도 잘 잡았다.
터덜터덜 벙커 계단을 올라오던 이장준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창밖으로 최성윤의 시체 하나가 또 늘어 있었다. 시발. 바닥에 쓰러져 저를 응시하는 시선에 장준이 이를 악 물었다. 꽉 쥔 주먹 탓에 손톱이 살을 파고 들었다.
“야 이장준!”
그 손을 덥썩 움켜잡은 성윤이 장준의 명치를 뻑 후려쳤다. 으억 굵직한 비명과 함께 장준도 저 시체들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너 내가 분리수거 똑바로 하랬지. 쫓겨나고 싶어?”
“죄, 죄송...”
고통을 감내할 새도 없이 장준은 엉금엉금 쓰레기통으로 기어 갔다. 아니 어차피 지구 망했는데 분리수거 해야 돼요? 맞는 말이었다. 플라스틱은 이제 지구에 위협거리가 안될 것이다.
“투덜대지 마라.”
“옙...”
최성윤은 진짜 이상하다. 사랑과 이해는 별개의 문제였다.
-
104일째. 성윤은 눈에 띄게 헬쓱해졌다. 원래도 끼니를 잘 거르던 사람인데, 역시 못 먹고 사는 것과 안 먹고 사는 건 달랐던 것 같다. 홀쭉하게 들어간 뱃가죽을 살살 쓰다듬던 장준이 도드라진 어깨뼈에 대고 오물오물 입술을 비볐다. 간지러워. 힘없는 목소리는 타격감이 세다. 좀 더 몸을 붙이고 날개뼈를 핥았더니 성윤은 이상한 웃음 소리를 냈다.
“으히힉, 하지 마.”
이장준은 최성윤이 하지 말란 건 하지 않았다. 지금도 얌전히 하던 짓을 멈추고 목덜미에 코나 박았다. 미지근한 살냄새와 미미한 드라이샴푸 냄새가 풍겼다.
“보통 말이야. 환각이라는 건 보통 좋은 거잖아.”
“응?”
요즘 부쩍 말이 늘었다. 한사코 붙잡고 읽던 책들은 다 판매용 진열대 위로 올라갔고, 성윤은 책 대신 멍하니 창밖이나 보았다.
“저 안개도 그랬으면 어땠을까.”
“제일 좋아하는 게 보였으면?”
“그럼 사람들 다 마약하는 것처럼 뛰쳐나와서 들이마셨을까.”
...재밌었겠다. 하지만 거리로 뛰쳐나와 안개를 흡입하고 헤롱거리는 최성윤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장준은 그 때도 최성윤이나 봤을 텐데 뭐. 아마 성윤이형이 열 명...
“너 뭔 생각하냐.”
앗 이런. 막무가내로 존재감을 드러낸 하반신이 어느새 성윤의 엉덩이에 닿아있었다. 최성윤이 물어본다고 또 곧이 곧대로 대답할 뻔한 이장준이 제 대가리를 퍽퍽 쳤다. 저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올게요. 성윤은 붙잡지 않았다. 손전등 빛이 스치는 마른 등은 일정하게 들썩거리면서도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서늘하다.
장준은 원래 야간 알바였는데, 한밤중의 편의점이 오랜만이었다. 어둡고 고요하고, 텅 빈 모습이다. 석 달 전만 해도 꽉 차 있던 매대가 이젠 텅텅 비어있었다. 더 이상은 교환해 줄 것도 없다. 이것들은 당장 성윤이 먹기에도 부족했다. 더군다나 곧 겨울인데... 형은 자기 생존이 우선이랬다. 이 벙커도, 편의점도 원래 형 혼자 살기 위해 만든 거고 그 계획에 이장준은 없었을 게 분명했다. 제가 성윤의 남은 수명의 반을 똑 떼 먹은 셈이다.
나는 사실 최성윤이 죽는 것보다 내가 죽는 게 더 무서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유리창 밖으로 최성윤의 시체가 쓰러졌다. 이제 문을 열면 발을 딛기도 어려울 만큼 그것들이 쌓여있다. 다 허상이다. 저게 정말 무섭다면 애초에 여길 나가야 했는데.
“아직도 서 있냐?”
뒤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최성윤이 동시에 장준의 거기를 덥썩 잡았다. 아악 형!! 때 아닌 괴성이 쟁쟁하게 울렸다. 겨우 죽였던 고추가 다시 움찔거려서 이장준은 목까지 시뻘개졌다. 창백한 얼굴에 빛을 받은 성윤이 웃는다.
“미친 거 아냐?! 한 판 해요?! 어!”
이번엔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마냥 웃는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아 진짜 가만 안 둬. 내일 편의점 쉽니다? 예? 번쩍 성윤을 안아 든 이장준이 쿵쿵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낮은 벙커 천장에 머리를 박고도 좋다며 광대가 치솟는다. 나름 센티멘탈한 순간이었는데 다 부질 없다.
-
부질 없긴. 존나 부질 있다. 장준은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부터 끙끙 앓았다. 이젠 꿈에서까지 최성윤이 죽었는데 사인은 안개가 아니었다. 지 때문이었다. 이장준이 멍청하게 최성윤 밥을 축내고, 이장준이 멍청하게 편의점 문을 안잠궜고, 이장준이 안개에 중독된 나머지 자고 있던 최성윤의 목을 조르더라. 깨어나자마자 식식대는 숨소리를 확인하며 덜컥 멈췄던 심장을 고쳤다. 어쩐지 밥맛이 뚝 떨어졌다. 일찍 일어나면 배나 더 고프다고 한사코 점심 때까지 잠을 자는 성윤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벙커를 둘러봤다. 홀홀단신으로 쳐들어 온 몸이라 제 물건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떠나고자 한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면 그만이다.
“몇 시야…?”
하지만 오늘따라 일찍 깬 최성윤 덕에 일단 엉덩이를 붙이고 다시 앉았다. 열 시요. 더 자요. 퍽 다정한 목소리인데 묘하게 멀다. 최성윤은 이장준이 하지 말란 건 다 한다. 하라는 것도 절대 안 한다. 무슨 똥고집인지 꾸벅꾸벅 감겨오는 눈으로 이장준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밥 먹을까. 배고프다.”
그래도 먹으려는 의지는 있어서 다행이다. 후다닥 일어난 장준이 통조림 한 개를 대령했다. 오늘은 콩요리다. 지름이 십 센티 남짓한 캔 안으로 젓가락 두 개가 푹푹 꽂혔다. 그 중 하나는 입 근처로는 가지도 않고 그렇게 애꿎은 콩만 찔러댔다. 성윤이 아랑곳않고 아구질을 했다. 장준의 젓가락을 피해 튕겨나온 콩을 쏙쏙 잘도 골라 먹었다.
“우리도 늦기 전에 나갈까?”
꼭 무슨 동네 마실 나가는 것처럼 굴어. 밥을 깨작거리던 이장준의 손이 멈췄다. 가긴 어딜 가요. 여기 있어야지. 그러려고 만든 거잖아. 오늘따라 말투가 띠껍네 우리 장준이. 어제 뒤지게 구른 건 난데 말이야. 최성윤은 비실비실 웃으면서 장준을 쳐다본다.
"왜. 영화 보면 꼭 생존자들의 낙원 같은 거 있잖아. 대충 서해나 동해로 나가면 또 살 방법이 있겠지."
"무슨... 됐어요. 밥이나 먹어요."
어, 지금 건 좀 싸가지 없었나. 형 그런 거 존나 싫어하는데. 괜히 쫄려서 눈도 못마주치고 젓가락이나 틱틱거리는데 맞은편이 조용했다. 불안하다. 제 시야에 겨우 걸리는 최성윤의 팔이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장준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휘어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넌 근데 왜 밥 안먹냐?“
좆됐다. 삔또 제대로 상한 성윤이 한쪽 입꼬리만 삐죽 올리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배가 안고파서용."
어줍잖게 부리는 애교에 풀릴 수준이 아니었다. 젓가락을 탁 내려놓은 성윤이 낮게 씨발 소리를 뱉었다. 장난하냐 너? 아이 왜 그래요 형. 장준이 그를 달랜답시고 콩 한쪽을 입에 넣어보지만 그것 역시 글렀다. 순식간에 통조림 캔을 낚아챈 성윤이 날랜 솜씨로 그것을 집어 던졌다. 팡! 벽에 부딪힌 캔에서 축축한 콩들이 터져 나온다. 아니 저 아까운 걸... 당황한 장준이 허둥대며 성윤을 끌어안아보지만 늦었다.
"됐어? 너 뭐가 문젠데? 여기가 좆같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기 아니면 내가 어떻게 산다고. 응?"
"그럼 내가 문제야? 내가 나가면 돼?"
"형!!"
성윤이 장준을 밀치고 무작정 계단을 올랐다. 벙커 가득한 제 물건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 한 가운데 서 있는 이장준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게다가 밖은 벌써 눈이 내릴 날씨인데 마른 몸에 달랑 스웨터차림이었다. 이장준이 아무리 힘이 세다 한들 최성윤을 막는 데엔 문제가 있다.
"형 잠깐만요!"
"놔. 안 놔?!"
퍽- 후리는 뒷발에 장준이 억 소리를 내며 몸을 구부렸다. 최성윤은 이장준을 후드려 패도 이장준은 그럴 수 없었다는 거다. 아프다고 흡 숨을 참는 정수리에 움찔하긴 했지만 성윤은 이를 악 물었다. 쿵쿵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뒤에선 금세 정신을 차린 이장준이 달려 올라왔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울며 비는 목소리에 손이 떨렸다. 아니 그런 거 맞아. 목울대에서 뜨끈한 울음이 턱 걸렸다. 이 벙커는 좆같았다. 시발 더럽고 추했다. 최성윤은 가장 첫 번째 날 이장준을 찾겠다고 밖으로 나선 일이 뼈저리게 후회됐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장준은 제 옆에 없었을 것이고, 제 추악한 면도 몰랐을 것이고, 저와 입을 맞추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없었을 테다. 살기 위해서. 이장준이 그냥 그 날 죽었더라면 살기 위해 저를 사랑하는 짓 따윈 안 했을 텐데.
깊고 좁은 벙커의 문이 열렸다. 옛날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온갖 쓸 데 없는 물건들로 가득한 편의점. 그 앞에 멍하니 선 성윤은 카운터를 슬쩍 돌아봤다. 이장준은 늘 저 자리에 서 있었다.
"최성윤!!"
벙커 입구에 서 있던 성윤의 어깨를 장준이 홱 낚아챘다. 아! 단말마와 함께 제 앞으로 뛰쳐나가는 장준의 등이 보였다. 거대한 빛으로 돌진한다. 빛? 저 너머로 보이는 유리창에서 눈부신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흥분했던 탓에 미처 모르고 있던 엔진 소리가 뒤늦게 편의점 안으로 침범했다. 쿵! 동시에 벙커 문이 닫혔다. 어? 그 안엔 최성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장준아?"
이장준이 없다. 야, 문 열어!! 성윤이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작은 주먹질에 벽이 덜덜대며 진동했다. 시발 뭐야.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성윤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이장준!!"
새된 비명 소리가 충돌음에 먹혀 들어갔다. 쿠구구궁- 이 개 같은 벙커. 바닥이 요란하게 흔들린 탓에 성윤이 중심을 잃고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급하게 내딛은 손목이 꺾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악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장준은 저 밖에 있었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중얼거리며 성윤이 엉금엉금 계단을 올랐다. 파열된 문틈으로 하얀 연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
온통 하얀 세상이다. 최성윤은 폐 깊숙이 그것들을 채워 넣고 토해내길 반복했다. 벙커 문 바로 옆으로 위협적인 작태의 덤프트럭이 뒤집혀 있었다. 성윤의 희멀건한 얼굴이 무너졌다. 장준아, 차를 몇 바퀴고 빙빙 돌며 그 아래를 파고 들었지만 이장준은 없었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다행히 피는 아니었다. 아슬아슬한 기름 냄새다. 그 냄새에 심장이 더욱 쿵쾅거렸다.
“이장준!!”
분명 근처에 있을 텐데 앓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박살이 난 냉장고, 멀리 날아간 카운터, 덤프트럭 옆으로 싸그리 밀려버린 매대 같은 것 사이사이를 뒤졌다. 없다. 이장준이 없어. 성윤은 목이 다 쉬도록 악을 썼다. 결국 편의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대답해... 어딨어!”
쿵. 전봇대에 어깨를 박았다. 얼얼한 통증에 몸이 흔들렸다. 시야가 뿌옇게 번지고 있었다. 안개 때문이 아니다.
“성, 유... 형...”
작은 목소리를 용케 알아챈 최성윤이 고개를 돌렸다. 시발. 장준이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나타났다. 한 걸음에 다가간 성윤이 그 얼굴을 움켜잡았다. 머리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흐리멍텅한 동공이 느리게 깜빡거린다. 씨발! 억세게 놈을 뿌리친 성윤의 어깨가 툭 빠졌다. 사실 명확한 통증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른팔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걸 보니 그랬다. 성윤은 다시 장준을 찾는다.
뒤를 돌자 바로 지척에 있던 이장준 하나가 목을 꺾었다. 그리고 또 이장준이 손목을 긋고, 이장준이 피를 토하고, 이장준, 이장준, 이장준. 무수히 많은 장준에 둘러싸여 최성윤은 울음을 참았다. 옷소매로 눈을 벅벅 닦는다. 이딴 게 다 뭔데. 제 팔을 잡고 매달리는 그것들을 마구 밀쳤다. 그러다 결국 그것들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진짜 이장준은 어딨냐고. 장준이 데려오라고.
톡. 콧잔등 위로 차가운 것이 닿았다 사라졌다. 토독, 톡.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형...”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던 최성윤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디지? 두리번거리는 시야 저편으로 검은색 인영 하나가 꾸물거리는 게 보였다.
“야, 야, 이장준?!”
깊은 안개를 뚫고 최성윤이 달렸다. 허상들이 와르르 사라진다. 바보같이 차도 한 가운데 대자로 누운 이장준은 갈 듯 말 듯 눈을 깜빡였다. 미친놈아 눈 떠! 그랬더니 억척스럽게 눈에 힘을 주는 게 보였다.
“형 울어?”
“뒤질래, 빗물이거든.”
오래 묵혔던 장마가 한꺼번에 쏟아지듯, 온 도시가 빗소리로 가득 찼다. 차가운 빗물에 장준의 몸을 덮고 있던 핏물이 씻겨져 내려간다. 다급하게 옷을 벗기고 상처를 확인하려는 성윤의 손을 장준이 뜯어말렸다.
“형, 형, 형, 이거 내 피 아니야...”
“뭐?”
이 미친놈이. 실실 쪼개는 이장준의 낯짝에 습관성 죽빵을 갈기려던 성윤이 손을 내렸다. 창백하던 성윤의 얼굴이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른다.
하얀 안개 대신 칙칙한 골목의 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